후삼국과 지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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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2-1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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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의 성립
사료
이때에 신라의 정치가 혼란하여 반란군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한편 견훤은 완산주(전주)에서 처음 하여 백제의 옛 땅인 무진주(광주)까지를 장악한 뒤 왕위에 올랐다(892). 견훤이 국호를 후백제라고 칭하면서 완산주에 도읍을 정한 점이나, “지금 내가 감히 도읍을 완산에 정하고 어찌 의자왕의 숙분을 씻지 아니하랴”라고 말한 점 등은 백제를 계승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궁예와 견훤이 그 대표적 인물인데 우선 궁예는 옛 고구려 땅인 패강일대 즉 철원, 개성 (송악)을 배경으로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면서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했다(901). 그가 패강 일대를 배경으로, 그것도 국호까지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고려라 칭한 것은 이 지역주민의 지역의식에 편승한 것으로 반신라 투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는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왕건도 마찬가지인데 특이한 점은 궁예가 토착민이 아닌 반면 왕건은 고구려계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견훤은 대 신라정책을 추…(dr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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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서 후삼국시대가 열린데에 지역주의가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알아보았습니다.한국사 , 후삼국과 지역주의경영경제레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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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견훤 역시 궁예와 마찬가지로 그 출신 constituent 이 신라인이라는 점에서 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민족융합정책 대신 배타적, 差別적 정책을 펼친 신라가 쇠퇴하자 전국 각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호족들이 출현했으며 특히 지역의식에 편승하여 나라를 세우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는 물론 옛 백제지역의 반신라적 정서에 편승하여 자신의 지배욕구를 실현하겠다는 계산의 결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신라 왕족출신이라는 약점을 가진 궁예에게는 토착적인 기반이 없어 선대부터 패강지역을 무대로 해상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송악지방 제일의 토착세력인 왕건과의 주도권 다툼에 큰 부담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궁예의 큰 한계로 작용하여 결국 왕건에게 축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견훤(甄萱)은 반란을 일으키어 남쪽 땅에 웅거하고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였으며 궁예(弓裔)는 고구려 옛땅에 웅거하여 철원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삼국시대에서 후삼국시대가 열린데에 지역주의가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알아보았습니다.